2009년 7월 5일 주일낮예배/맥추감사주일
본문: 출 23:16
제목: 맥추절이란?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맥추절 때마다 제가 내는 퀴즈입니다. 오순절, 칠칠절, 초실절은? 1) 이스라엘 3대 절기 2) 오순절은 5월에 지키고, 칠칠절은 7월에, 초실절은 초가을에 지킨다. 3) 오순절, 칠칠절, 초실절이 다 맥추절의 다른 이름이다. 정답은? 3번입니다. 맥추절은 이름이 많습니다. 유월절로부터 오십일째 되는 날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입니다. 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일곱 안식일 다음이라고 해서 칠칠절, 초실절은 한 해 농사의 첫 수확물이라 해서 초실절입니다. 모두 맥추절을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퀴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는? 1) 한 많은 아리랑 고개 2) 눈물의 미아리 고개 3) 한 번 넘어지면 3년밖에 못사는 3년 고개 4) 태재고개 5) 보릿고개. 정답은 5번입니다. 정답 맞히신 분은 오늘 보리밥 두 그릇 드십시오. 보릿고개가 왜 가장 높습니까? 태산보다 높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높은 산을 태산이라고 하는데, 그 태산보다 더 높은 게 보릿고개입니다. 실제 보릿고개를 못 넘어 죽은 사람들 많았습니다. 그렇게도 혹독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맥추감사절은 참으로 감격적이었습니다. 죽다가 살았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요즘은 보리농사도 짓지 않고 보릿고개도 전설이 되어 버렸는데, 왜 맥추절입니까?

보릿고개를 넘을 일은 없어도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우리가 계승해야 할 소중한 정신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맥추절은 우선 그야말로 초실, 첫 열매, 초 태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맏물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상반절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역시 출애굽기 34장 22절입니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신명기 26장 10절입니다.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왜 토지소산의 초실을 드려야 합니까? 왜 짐승의 초 태생을 드려야 합니까? 첫 번째 것은 그게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 열매, 맏물, 장자, 초실이 갖는 대표성 때문입니다. 첫 열매는 그 이후에 생산되는 모든 열매를 대표합니다. 맏물은 그 이후에 수확하는 모든 작물을 대표합니다. 한 주의 첫날은 그 주간의 모든 날을 대표합니다. 장자는 모든 형제와 자매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첫 번째 것을 성별하여 당신께 바치기를 원하십니까?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맏물, 첫 열매, 첫 새끼, 첫 날, 장남을 당신께 바치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세상 맏물이 다 나의 것이라는 겁니다. 주일 성수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을 바침으로써 이 사실을 깨달으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조건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온몸으로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첫 번째 것을 그토록 집착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내 소유를 다 드리는 것이고, 초 태생을 드림으로써 내 짐승 전부를 다 드리는 것이고, 한 주의 첫날을 바침으로써 한 주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장남을 바침으로써 내 자식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 겁니다. 이게 첫 번째 것의 대표성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장자를 통해 그 가계를 축복합니다. 왜냐면 맏이가 모든 형제자매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 챈 것도 이런 장자문화의 대표성 때문입니다. 실제 유럽 사회를 보면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특히 신부나 수녀들은 다 장자나 장녀들입니다. 장녀를 수녀로 바치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식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장자를 신부로 바침으로써 자기 자녀를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겁니다. 맏물, 초 태생,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식이 바로 맥추절의 정신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계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반드시 흠 없고 티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도 맥추절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분이시기에 흠과 티가 있는 제물을 바치면 신성모독입니다. 레위기 23장을 보면 맥추절에 바치는 떡은 무교병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누룩대신에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누룩을 제하라는 것은 흠 없고 순수한 맏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22장 20절입니다. “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가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흠 있는 것을 바치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무흠한 것을 바쳐야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 제물을 접수하십니다. 시편 50편 10절 이하입니다.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바치는 제물에 담긴 흠 없는 내 고백을 원하시는 것이지, 짐승의 고기와 피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짐승의 피와 고기로 고백된 내 신앙을 받으시길 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흠과 티가 있는 제물은 내 믿음이 온전치 못하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돈만 바친다고 헌금이 되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내 수입의 1/10을 떼서 바친다고 해서 십일조가 되는 게 아닙니다. 흠이 없어야 합니다. 누룩대신에 소금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향기로운 제물이 됩니다. 그래야만 내 제물을 하나님이 흠향하십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중요한 소임 중 하나가 백성들이 바치는 제물을 검열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을 먼저 검열하는 겁니다. 흠과 티가 있으면 부적격 판정을 받습니다. 적격 판정을 받은 제물만 하나님께 바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비리가 많았습니다. 제사장들이 하수인을 통해 성전 뜰에서 제물을 팔았습니다. 외부에서 가져 온 제물은 무조건 부적격 판정을 내리고, 성전 뜰에서 파는 제물만 적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며 다 쫓아내신 겁니다. 주일 성수도 온전하게 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시간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겁니다. 한 주간의 첫날이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입니다. 주일날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으로 주일 성수를 한 게 아닙니다. 하루 종일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루를 온전히 흠과 티가 없이 바쳐야 합니다. 그게 주일 성수입니다. 십일조도 제일 먼저 떼어야 합니다. 쓰고 남은 것을 바치는 게 십일조가 아닙니다. 아이들 학원비보다 먼저 떼어야 합니다. 그게 첫 열매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제물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돈이 없어 십일조를 못할 사람은 없는 겁니다. 돈이 없어 굶을 수는 있지만 수입이 단돈 천원이라도 발생하는 한 돈이 없어서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내 수입 중 십일조를 먼저 떼는 게 맞습니다. 그래야 흠과 티가 없는 맏물이 됩니다. 맥추절 정신 가운데 흠과 티가 없는 온전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의 삶으로 구현하고, 생활로 계승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고 은혜를 입습니다.

맥추절은 희생을 드리는 절기입니다. 레위기 23장 9절 이하입니다. 제물들의 목록이 나오는데, 고운 가루, 짐승들이 나오는데, 그 양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제물은 항상 희생제물이라고 합니다. 제물과 희생이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얌체같이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축복은 누구보다 바라면서 희생은 사양합니다. 철저하게 희생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도 희생 없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희생 없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희생 없는 예배, 희생 없는 제물, 희생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어떻게 십자가 안지고 신앙생활하려고 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한 톨의 보리가 희생을 거부하면서 어떻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시지 않고, 당신의 초 태생을 희생시켰습니다. 당신도 맏아들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정말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을 바쳤습니다. 나는 절대 희생할 수 없다는 분은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희생을 감수하십시오. 그게 바로 하나님이 흠향하시기에 합당한 맥추절 제사입니다. 맥추절의 이런 기본 정신을 계승합시다. 첫 열매를 드리고, 흠없고 티없는 제물과 희생을 바칩시다. 이것이 더 큰 은혜와 복을 수확하는 소중한 비결임을 깨달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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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나라의별

2009년 7월 5일 주일오후예배
본문: 히 11:4
제목: 아벨의 제사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오늘 이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 4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된 다음에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가인, 둘째는 아벨입니다. 형은 농부가 되고, 아벨은 목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두 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아마도 초실절이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이 예배로 말미암아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드린 제사는 안 받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 하신 겁니다.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해서 결국 살인사건으로 비화됩니다. 형이 동생을 돌로 쳐죽입니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살인사건이고,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 끔찍한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게 예배인데, 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을까요?

가인은 곡식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벨은 양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동생이 드린 제사는 양으로 드린 피의 제사였기에 하나님이 흠향하시고, 가인이 드린 곡식은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사양하신 겁니까? 전통적인 주석은 이렇게 해석해왔습니다. 사실 이 때는 모세의 율법 이전입니다. 반드시 피의 제사를 바쳐야 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단지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기에 양을 바쳤고, 가인은 농부였기에 곡식을 드린 겁니다. 그러면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합니다. 피의 제사냐 아니냐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히브리서의 해석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양을 바쳤고, 가인은 믿음으로 곡식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3-5절입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우리가 창세기 4장 말씀만 보면 두 사람의 제사 차이를 못 느낍니다만, 그런데 이 대목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은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믿음의 차이로 나눕니다. 대체 믿음의 차이라는 게 어디에 나타납니까?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바치는데, 가인은 그냥 곡식을 드립니다. 하나님께는 첫 곡식을 드려야 합니다. 아벨이 첫 새끼를 드린 것처럼 곡식도 초실을 드려야 합니다. 이를테면 가인은 자기 먹던 양식을 퍼다가 하나님께 제사했고, 아벨은 첫 양을 바쳤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두고 믿음의 차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절대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주를 살기 위해 치르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인은 종교의식을 바친 겁니다. 통과의례로 예배를 드린 겁니다. 죽은 제사입니다.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믿음의 제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벨은 첫 새끼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겁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창세기 4장 4절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아벨이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데, 가인도 받지 않으시고, 그 제물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실린 그 존재 자체를 받고 안 받고 하십니다. 그러니 산 제사가 무엇인지, 제물이 무엇인지를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하여간 예배는 자기 존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신이 아닙니다. 양고기로 혹은 양의 피에 담아 드리는 우리의 고백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와 삶이, 제물과 우리 존재가 따로 놉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예배는 우리 전부를 드리는 겁니다.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배만 받으십니다. 우리 중 누구의 예배를 받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고 기뻐하시길 기원합니다. 맥추절에 담긴 정신을 깊이 새깁시다. 하반기에는 정말 산 제사를 하나님께 바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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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나라의별

新보릿고개

칼럼 2009/07/03 16:11

보릿고개란 요즘은 생경한 말이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이 땅의 배고픔의 대명사였습니다. 봄이 되면 지난 가을 수확한 곡식은 바닥이 나고 바랄 것은 오직 햇보리뿐인데 그러나 아직은 낟알이 여물지 않은 5-6월 춘궁기, 일 년 중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웠던 그 고비를 넘기기란 누구도 쉽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거나 <보릿고개에서 죽는다>는 말까지 생겨났겠습니까? 사람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소나무 껍질(송기)을 벗기거나 언 땅에서 칡뿌리를 캤고, 논에 나는 자운영이나 쑥에 밀가루를 묻혀 찐 개떡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어느 시인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한 입 덜자고 아직 여물지도 않은 딸년 시집 보내놓고 울고 / 늙은 할미는 내가 빨리 죽어 / 한 입이라도 줄여야 한다며 밤낮 넋두리였다 / 하루 해는 왜 그리도 길었던가 / 포동포동 살 찐 허연 달을 보며 / 우물물로 배를 채워 보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렇듯 보릿고개는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 온 우리 민족의 눈물겨운 가난의 고개요, 잘 넘으면 또 한 해를 그럭저럭 살고, 못 넘으면 굶어 죽어야 했던 운명의 고개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쌀이 남아돌고, 보리밥은 웰빙과 다이어트 식단의 인기 메뉴가 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최근 지구촌에 닥친 글로벌 경제위기는 우리 사회에 때 아닌 보릿고개를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지난 상반기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보릿고개와도 같은 엄혹한 시기였습니다. 잔치가 한창인데 졸지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 사회와 세계가 꼭 그 꼴인데, 결국 현장에 계시던 주님이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며 처방을 내리시잖습니까. 물론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곧 주님이 시키는대로 했고, 다시 물을 떠다 손님들에게 갖다 줬을 때는 이미 물이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자칫 실패할 뻔한 잔치가 도리어 가장 성대하고 풍성한 축제로 끝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사단이 있습니다. 잔뜩 손님을 청했는데 포도주가 떨어져 망신을 당할 수도 있고, 처음에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저질 포도주처럼 실망스럽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집니다. 잔치를 위한 포도주는 충분한가? 또 얼마나 질 좋은 포도주인가로 우리의 삶의 성패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포도주가 소진돼 이미 우리의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이 지금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게 잘 납득이 안 되더라도 가나의 혼인집 하인들처럼 일단은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사실 가장 이성적이라는 이 시대를 향해 <이해가 안 되더라도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먼저 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괜히 혼자 다 아는 체하며 자기 생각을 절대시하지 말고 속 깊은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 볼 일입니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돌 같은 심령에 채워진 그 말씀이 익어 마침내 양질의 포도주로 변화될 것이고, 우리의 가정은 2009년형 신보릿고개, 세계인들을 떨게 하는 이 글로벌 춘궁기를 가장 넉넉하게 이기는 가나의 혼인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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